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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공민왕(恭愍王)

공민왕은 고려 제 31대 왕으로, 그를 모신 사당이 와우산 밑의 창전동에 있다. 공민왕의 이름은 전(?), 처음 이름은 기(祺)이다.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으로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정왕 1년(1349)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왕비로 삼았다.

공민왕은 14세기 후반,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를 이용해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배원정책을 펴 몽고의 잔재를 없애고, 북진정책을 실시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위약하게 한 친원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00년 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52년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내부의 반란으로 국력이 소모되기도 하였다.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국사를 중 신돈에게 맡기고 등한히 했으며, 결국 신돈도 귀양보내고 처형시켰다. 이후 남색에 빠져 잘 생긴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였다. 자제위 소속 홍륜이 익비 한씨를 범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비밀이 들통날까 두려워 한 이들이 공민왕을 시해했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있다.

천산대렵도

효령대군

효령대군(孝寧大君)

망원동 137번지와 207-1번지 일대, 지금의 망원정 자리는 세종 때 효령대군이 별장을 짓고 귀족들과 함께 풍경을 즐기던 교외의 명소로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다.

1424년에 세워져 세종이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은 1425년에 서교에 나와 농정을 살피다가 이곳에 올랐는데,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들판을 흠뻑 적시니 왕이 이를 매우 기뻐하며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지었던 것이다. 이 때 정자의 주인이었던 효령대군은 왕에게 감사하며 당시 서도(書道)로 이름 높던 부제학 신색(申穡)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아 현판을 달았고, 시문의 대가였던 변계량(卞季良)에게 「희우정기(喜雨亭記)」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정자는 강변에 가까운 언덕에 있었고 주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이 부근은 명승지뿐만 아니라 수군과 육군의 훈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

효령대군(1396~1486)은 태종의 둘째아들로 이름은 보(補), 자는 선숙(善叔)이다.

20세 때 대군으로 봉해졌는데,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항상 태종을 따라 사냥터에 다녔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인 태종이 병에 걸리자 밤을 세워 간호하고 손수 시탕을 돌보았다. 또한 동생 세종과 우애가 깊어 왕이 자기 집에 들리면 밤이 깊도록 국사를 의논하였다. 세조와의 친분 또한 두터워 효령대군이 궁궐에 다녀 나올 때는 세조가 친히 등촉을 밝혀 들고 배웅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에 독실한 효령대군 수많은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론하게 하였으며 1464년 원각사(圓覺寺)가 창건되자 조성도감제조가 되어 역사를 친히 감독했다. 불교에 대한 효령의 애정은 이에 그치지 않아 『원각경(圓覺經)』을 국역으로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만년에는 좁은 별실을 만들어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기거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

월산대군

월산대군(月山大君)

합정동 457-1번지 한강 동쪽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은 효녕대군의 별장이었는데, 성종 때 월산대군의 별장이 되면서 망원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종왕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이곳에 나와 농사상황을 시찰하고 수전연습을 관람하였으며 성종 때도 이러한 관례는 계속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써 유명한 망원정은 1925년 을축홍수의 피해와 연안도로공사 등으로 인해 훼손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망원정의 주인인 월산대군(1454-1488)은 성종의 형으로 이름은 정이고,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7세 때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에 월산대군에 봉해지고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의 주선에 의해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월산대군의 동생인 제안대군(濟安大君)을 즉위케 한 것이었다.

이 때 성종은 한명회와 함께 이러한 조치에 대한 왕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구성군 준(龜成君 浚)을 제거하고 권신들을 좌리공신에 책봉하였다. 이로 인해 월산대군은 왕위계승에 있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공신으로 책봉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으며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희우정을 개축한 망원정에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며 풍류적인 생활을 하다가 3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희우정을 망원정이라 이름 지은 것은 이 정자에 오르면 산수간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성품이 침착, 결백하고 산수를 좋아했다. 특히 월산대군은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은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여러 편이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고, 저서로는 『풍월정집(風月亭集)』이 있다.

신숙주

신숙주(申叔舟)

마포동에는 세조 때의 고관으로 유명한 신숙주의 별장 담담정(淡淡亭)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권 3에 의하면 신숙주는 마포 북안에 담담정을 짓고 당대의 문장가인 강희맹(姜希孟).이극감(李克堪) 등과 시를 지으며 즐겼다고 한다.

신숙주(1417~1475)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21세 때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집현전 수찬을 지냈고 일본에 서장관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신숙주는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에 공이 많았는데 왕명으로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당시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려 요동을 8차례나 다녀왔다. 그 후 집현전 응교와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특별한 유대를 맺게 된 이래 계유정란 이후 더욱 돈독해졌다. 세조는 죽음에 즈음하여 “당태종에게는 위징(魏徵)이 있었고, 나에게는 숙주가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신숙주에 대한 총애를 표현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나 일찍이 밀모에 참가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그 후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의 호를 받고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신숙주는 1459년 좌의정에 올랐는데, 이 무렵 동북방면에 야인의 침입이 잦아지게 되자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강원.함길도체찰사가 되어 야인정벌을 위해 출정하였다. 야인정벌시 그는 군사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러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신숙주는 세조 때에 이어 성종 때에도 좌리(佐理)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임명되는 등 2대에 걸쳐서 고관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과거시험관을 13차례나 했고, 예조판서를 십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하여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했다. 성종대에 이르러 신숙주는 노병을 이유로 여러차례 사직하였으나 그때마다 그의 학문과 문장을 높이 평가한 성종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숙주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관직생활 속에서도 줄어들지 않아 재직 당시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종 3년에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이어서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등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일본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 사선(私船)의 왕래 절차 등을 모두 기록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과의 교빙(交聘 :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使臣)을 보내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특히 그는 외교와 국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문장에 능하여 당시 거의 모든 외교문서는 그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설체에 뛰어난 신숙주의 필적으로는 「몽유도원도 찬문(夢遊桃源圖 贊文)」과 진당풍(秦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楷書體)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史倪謙時稿)」가 있다. 『보한재집』은 그의 7세손이 1644년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한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신숙주의 별장이었던 담담정, 초원 김석신

신숙주의 별장이었던 담담정, 초원 김석신

이지함

이지함(李之函)

이지함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에서 기거했다. 무소유를 실천한 자유인이자 조선 3대의 기인이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더 잘 알려진 학자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의 7대손이며, 현령을 지낸 이치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 이지번에게 글을 배우다 뒤에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며 천문, 지리, 의학, 음양에 통달하였다.

이후 마포 강변에 흙으로 움집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이 움집을 한자로 토정(土亭)이라 하였는데 이지함의 호이자 이곳의 동명이 되었다.

한편 선조 6년(1573) 그의 나이 56세에 조정에 천거되어 포천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 백성들의 생명을 구한 일로 유명하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8년 아산현감에 등용되었는데, 부임 즉시 걸인청을 만들어 경작지가 없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러나 62세에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지게 되었고 이에 백성들이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한백겸

한백겸(金自點)

상암동은 실학의 선구자인 한백겸이 1608년 이후부터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원래 상암동은 수상리(水上里)와 휴암동(休岩洞)에 비롯되었으며 수상리는 수이촌(水伊村)이 변한 것이라 하는데, 한백겸은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물위치(수이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백겸이 상암동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은 동생 준겸(浚謙)이 이 곳의 북쪽 수리(數里)되는 곳에 농토를 가지고 살면서 이 마을 북쪽 산록의 밭을 형인 그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곳에 살게 된 것이라 한다. 백겸은 물 좋고 산수 좋은 곳에서 만년을 보낼 생각을 하고 수이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으로 고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구암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그 마을에서 옮겨가지 않고 오래 살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한백겸(1552~1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명길(鳴吉)이며 호는 구암(久菴)이다. 그는 민순(閔純)에게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는데 의리에 관한 연구에 힘써 문경논맹(文經論孟)에도 정통했다. 1585년 교정청이 신설되자 교정낭청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맡아 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 참봉이 되고 경기전(慶基殿)참봉을 거쳐 선릉(宣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으나 임진왜란으로 풀려났으며 당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를 참살한 공으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그 후 호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과 청주목사를 지냈다. 1607년 판결사를 역임하고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었으며 강원도 안무사를 거쳐 파주목사를 지냈다.

그는 역학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맡아 보았고 『동국지리』를 저술하여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동국지리지는 『전한서』의 조선전과 『후한서』 고구려전, 읍루전, 삼한전 등에서 4군과 고구려의 여러 성, 백제국도, 신라소경지(新羅小京志), 고려제경(高麗諸京) 등에 관한 기사를 뽑고 간간히 필자의 의견을 붙여서 지은 역사지리책이다. 『동국지리지』는 한백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1604년 아들 교흥(敎興)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물이촌의 원근풍경이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마을로 생각하고,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앞에는 강 건너 여러 산으로 남계(南溪), 관악, 금주(衿州), 소래(蘇萊)가 봉우리를 향하여 연접하여 둘러서 봉황이 춤을 추고 용이 공중으로 나는 듯 서로 창호간을 향하며, 왼쪽으로는 높은 세 봉우리(삼각산)가 1천길을 깎아 서서 위엄스러운 모습이 침범할 수 없는 형세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먼 포구와 메 뿌리가 한끝 아득하여 모든 것을 다 포용할 도량을 보이니 잠시간에 돌아보는 중에도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그리고 바로 문 앞에 마주서는 것을 선유봉이라 하는데 한 덩어리 외로운 산이 강 가운데로 날아 떨어진 듯, 여러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와도 같다. 그 주위를 둘러 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요정(逍遙亭)으로서 백척(百尺)이나 되는 동부(洞府)가 문을 열어 놓은 것 같다. 그 밖에 높은 돛대 조각돛이 바람을 따라 오가며 여기저기에 보이다 말다 하니 들판 밖 큰 강가에서 언제나 구경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늙은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6, 7마리씩 무리를 지어 혹은 물 마시고 혹은 누워 있으니 문밖의 푸른 풀은 언제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연기 저녁 노을과 가을의 달, 봄의 꽃으로 그 경치가 때를 따라 무궁무진한데 모든 것을 다 눈 앞에서 거두어 간직하여 우리 집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오직 후면만은 보이는 것이 없고 높은 벼랑과 끊어진 산록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북풍이 세차게 불어도 등을 내놓으면 따사롭다. 선유가 음양가(陰陽家)는 체사용삼(體四用三)이 이수를 논하여 ‘천지간에 동, 서, 남은 볼 수 있지만 북쪽은 볼 것이 아니다’라 하였는데 이곳이 참으로 천지 자연의 형세를 이룬 것인가.

도성에 가기 한 쉴 터도 다 못되고, 궁전의 풍경소리 때로 들려오니 조정 대신들도 촌사(村舍)를 짓고 전토(田土)를 구하는 데 이곳보다 편할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오랜 동안 버려두어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신이 깊이 깊이 감추어 두고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한백겸은 원주의 칠봉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동국지리지』 외에도 『기전고(箕田考)』, 『구암유고(久菴遺稿)』 등이 있다.

권필

권필(權?)

현석동은 조선 중기의 시인 권필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당시 현석촌 일대 한강변 지역은 도성과 가까운 거라에 있고, 세곡선의 집결지이자 강상의 거점인 서강(西江)이 있어, 사대부가 정착하여 살기에는 적합치 않은 곳이었으나 권필 집안은 조부 이래로 대대로 이곳에 살았다고 하니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빈한했던 사대부로서 스스로를 ‘시주(詩酒)’라 지칭했던 권필의 면모를 상상해볼 수 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여장(汝章), 호는(石洲)이다.
권벽의 다섯째 아들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했으며, 술로 낙을 삼았고 시재가 뛰어났다.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강경한 주전론을 폈으며, 광해군 즉위 후 무옥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던 중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객사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주 운암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석주집』이 있고,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있다.

박세채

박세채(朴世采)

박세채는 현석동과 관련이 깊다. 이곳에 소동루(현석동 77번지 강변도로 옆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를 짓고 말년을 보낸 조선 숙종 떄의 문신 박세채의 호가 현석(玄石)이었던 데서 동명을 현석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박세채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당쟁이 심했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았던 그는 18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 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하였다.

이후 효종 10년(1659)에 박세채는 천거에 의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왕이 승하한 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거론될 때 서인측의 인물로 활약하다가, 숙종 즉위 후 관직을 박탈당하고 6년동안 양근, 지평, 원주, 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을 통해 그는 『독서기』를 비롯하여 『춘추보편』, 『심학지결』 등을 지었다.

이후 숙종 6년(1680년)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 집의를 거쳐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 떄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저서 『양명학변』, 『천리양지설』,『이학통로고집』,『이락연원속록』,『동유사우록』 등이 이 시기에 집필되었다.

박세채는 정치적으로는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탕평론을 취하였고, 예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특히 파당적 대립에 대해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하며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자는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 아버지를 여읜 후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이하응은 24세 때 흥선군에 봉해졌으나 당시 안동 김씨 일파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조친에 위협을 가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장안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파락호생활을 하거나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행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정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생활을 통해서 이하응은 서민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당시 궁궐 내 최고 어른인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후일을 도모하였다.

이윽고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하고 고종을 즉위시키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에 따라 이하응도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경복궁 중건을 착수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의 중건을 비롯한 그의 개혁 조치는 부작용과 함께 사람의 반발을 낳았다. 천주교도 박해와 쇄국정책은 일시적으로는 구미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도발을 막을 수는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 근대화의 길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자 영락한 가문에서 받아들인 명성황후 민씨가 도리어 고종의 친정을 단행케 함으로써 그 자신이 정계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후 대원군은 명성황후 민씨와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민씨와의 대결에 패해 아소정에 은폐되어 있던 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정계로 다시 나아갔다가 아관파천 후 양주 곧은골로 돌아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아소당 (我笑堂) 나의 짐 나의 몸이 맡은 것이 가볍지 않은데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술잔만 기울이네지난 일을 생각하면 모두가 한바탕 꿈인 것을 오로지 남은 생애 세숙에 맡기자니 부끄럽네나막신 신고 산촌을 걸으니 시골 덕담이 좋아 냇가 버들그늘에서 매미소리 들으며 시만 짓네세론은 어찌 나를 물러난 신분이라고 말하나 전생도 이생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만 나네

김자점(金自點)

성산동의 옛 고을인 풀무골은 반역죄로 처형된 김자점이 이곳에 풀무간을 차려놓고 병기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하고, 무이동(武夷洞) 뒤에 있는 「소식고개」는 김자점의 반란 계획 중 이 곳에 망보기를 세우고 서울 소식을 염탐하였다고 하여 얻어진 이름이라 한다. (주 : 한글학회, 『학국지명총람』 1, 1966, 84면)

김자점(1588~165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이다.

그는 성혼(成渾)에게 수학하고 음보로 벼슬에 나아가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논의에 반대하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이에 최명길(崔鳴吉), 심기원(沈器遠), 이귀(李貴) 등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고, 1623년에 군대를 모아 이귀, 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을 넘어 궁궐로 진격해 옴으로써 반정에 성공하여 정사(靖社)1등 공신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은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하는 임무를 담당하면서 왕과의 유대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637년 그는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제를 바꾸는 등 노력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철저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에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절도에 유배를 당하였으나 인조의 도움으로 풀려나 강화부윤을 지냈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 후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인조의 후의로 영의정에 오르고 효명(孝明)옹주를 손자 며느리로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이러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였고, 세자빈 강씨에게 인조를 시해하고자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시켰다. 또한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임경업(林慶業)이 귀환되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1649년 효종의 즉위로 전횡을 일삼던 김자점은 탄핵을 받아 홍천에 유배당하게 되었다. 김자점은 효종을 제거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효종이 청나라를 정벌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명나라 연호가 기록된 장릉 시문(長陵 時文)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즉시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고발사건은 효종의 기민한 수습과 중신들의 활약으로 수습하게 되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각지 수령과 지방 장수들과 내통하여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고자 했다는 김자점의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