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Mapo’s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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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공덕동
공덕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높은 고원의 평평한 곳을 뜻하는 우리말의 ‘더기’ 또는 ‘덕’, 언덕 을 일컫는 ‘큰 더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과 옛 지명인 공덕리(孔德里)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신공덕동

조선시대부터 있던 공덕리와 공덕동 인근에 생긴 신동을 합하여 신공덕동이란 이름이 탄생했다. 예전엔 주로 농작물을 키우던 밭이었는데 1895년 을미사변 무렵부터 사람이 거주했다고 한다. 일본 군인이 횡행 하는 도성 안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싫어 판서벼슬을 지낸 김대감이 일가식솔을 이끌고 낙향하여 농부가 되려는 생각으로 마포나루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이 일대라고 한다.

도화동

도화동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조선시대부터 복사골 혹은 도화내동이라 불렀다. 지금의 삼성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일대를 말한다. 1905년 경원선을 기점으로 주거지가 생기면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마포동

마포동
이곳에 마포나루가 있었다고 하여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한강변 해상 운송처였던 5개 곳(뚝섬, 노량, 용산, 마포, 양화진) 중 에서도 특히 붐볐던 곳으로 일명 ‘삼개’에서 삼→마(麻), 개→포(浦)로 의역되어 ‘마포’가 되었다.

토정동

토정동
이지함이 살던 곳으로 그의 호가 동 이름이 되었다. 해방 직후까지도 토정 이지함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었다 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영모비만 세워져 있다. 토정동의 옛고을 이름에 아랫토정, 윗토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예전부터 토정리로 불리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용강동

이곳이 한강의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풍수지리설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용산의 ‘용(龍)’자와 서강 의 ‘강(江)’자를 붙여 ‘용강’이라 불렸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또한 ‘독’, 즉 ‘옹기류’를 구워내는 움막들이 많았기 때문에 ‘옹막(甕幕)’, ‘옹리(甕里)’를 우리말 ‘독막’, ‘독마을’로 부르다가 우리 발음의 독이동으로 변전되면서 ‘동막’으로 되고, 그것이 다시 한자 ‘동막(東幕)’이 되었다고도 한다. 동막에서는 제법 많은 옹기 를 구워 팔았다고 하는데 옹기는 젓갈이나 김장을 위한 용도뿐만 아니라 술을 빚는 그릇으로도 많이 사용 됐다.동막 부근에서는 좋은 소주가 생산된다고 『동국세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공덕과 동막 사이에서 생산되는 소주의 일종인, 삼맥주(三麥酒)는 양조법이 까다롭고 일반 소주와는 다른 맛을 냈다 고 하는데 이곳에서 수천 독씩 빚어냈다고 한다. 이 삼맥주는 노란빛을 띠는데, 마시면 마치 이슬을 먹은 것처럼 산뜻하지만 그냥 두면 기름이 낀 것처럼 탁하다고 하였으며 오장에 특히 좋은 술이라 하였다.

신수동

신수동
신수동의 원래 이름은 수철리(水鐵里)에서 기원했는데 ‘수철’이란 이름은 신수동 일대를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무쇠막’은 예부터 국가에 무쇠솥이나 농기 구를 만들어 바치던 공장이 많이 있었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이다. 또 솥을 만드는 바탕을 설치해서 무쇠를 녹여부었기 때문에 ‘바탕거리’라고 부르던 곳도 있었다.

구수동

수철리 주변의 옛 마을이므로 구수동이라 하였다. 신수동과 마찬가지로 이 일대는 나라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치 던 공장이 있어 무쇠막, 무수막이라 하였다.

현석동

현석동
조선시대 숙종 때 박세채가 이곳 ‘소동루’에 살았는데, 그의 호 현석(玄石)을 따서 동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옛 이름은 농암(籠巖)이었다 한다. 한편 이 근처의 돌이 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그래서 ‘감은돌 동네’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감은돌은 검은돌의 고어 발음으로,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검은 돌 위에 있는 마을 이라 하여 ‘웃감은돌 마을’, 검은돌 등성이 뒤에 새로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 ‘안감은돌마 을’이라 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현석동 일대는 상업으로 부를 쌓은 사람 들이 별장과 정자,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부촌 이었다.

신정동

‘새우물’을 뜻하는 ‘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신정동 96번지 일대에 서강나루를 통해 들어오는 선박의 세금을 받아들이던 조선시대의 관청 ‘공세(供稅)’ 터가 있었으나 강변도로의 개설로 없어졌다. 신정동 77-1번지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는데 역시 강변도로가 건설되면서 헐렸다.

대흥동

대흥동은 용강동과 함께 독을 구워 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로 불렸다. 일제가 이를 ‘동막’ 으로 잘못 이해하여 동막(東幕) 상리와 하리로 나누었으며, 최근에는 다시 ‘대흥’으로 바뀌었다. 1929년 용산에서 당인리를 왕복하는 용산선을 개설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옹기를 만드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당인리 화력발전 소로 각종 물자를 운반하는 철도의 중간 기착점인 동막역이 건설되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염리동

조선시대에 소금은 귀중품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 마포는 전국의 소금배가 마포나루로 집결되면서, ‘마포 염’이라 불리는 소금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마포는 소금과 관련된 동이름이 많다. 마포동의 소금머리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던 소금전(시장)이 있었다. 대흥동의 동막역 부근에는 대규모 소금창고가 있었다. 용강동은 소금을 담는 옹기를 빚어 팔았다. 특히 염리동에는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 다고 한다. 이들 소금장수들은 용강에서 사온 옹기에 소금을 담아 나루에서 생선류와 서로 맞바꾸었다고 한다.

아현동

아현동
아현동이라는 지명은 우리말로 애우개 또는 애고개라 불러오던 데서 기인했다. ‘애’는 아이를 뜻하는 것으로 즉, ‘아이고개’를 뜻한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 밖에 묻었는데, 특히 아이 시체를 옹기에 담아 묻었던 곳이 애오개였던 것이다. 실제로 아현동 산7번지 일대에서 아총(兒塚, 아이무덤)이 많이 발견되었다한다. 그 외에 만리재에 비해 작은 고개라는 뜻에서 애고개, 아이고개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마포동의 소금머리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던 소금전(시장)이 있었다. 대흥동의 동막역 부근에는 대규모 소금창고가 있었다. 용강동은 소금을 담는 옹기를 빚어 팔았다. 특히 염리동에는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 다고 한다. 이들 소금장수들은 용강에서 사온 옹기에 소금을 담아 나루에서 나루에서 생선류와 서로 맞바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