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Mapo’s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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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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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돌도화동

조선 고종 때 김판돌이라는 사람이 매일 밤섬에서 고기를 잡아 칠패 시장에 팔았는데, 고기를 잡다가 자기가 살던 집을 바라다보니 절경 중에서도 으뜸이라 감탄하면서 닻이 닿는 순간 땅인줄 알고 뛰어 내려 익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만리재공덕동

세종 때의 학자 최만리는 술을 몹시 좋아 하였다. 어느 날은 취한 채로 어전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더니 세종이 만리를 걱정하여 “경은 몸을 생각하여 앞으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마오” 하였다.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 후에 세종이 만리를 접견할 때 술을 많이 마셨음을 알고 나무라기를 “경은 또 취기를 띠고 나왔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 하니 옆에 있던 동료가 “만리는 어명대로 세 잔만을 마셨을 뿐입니다. 단지 스스로 큰 술잔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이 껄껄 웃으며“경이 왕명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소” 하고 큰 은술잔을 만들게 하여 그 잔을 집현전 본관에 갖다 두고 수시로 만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만리를 아꼈던 세종은 신문(新門) 밖의 저택을 하사했고, 세상 사람들은 이곳이 천 칸의 집이 들어설 만큼 넓다 하여 천간허(天間墟)라 불렀으며, 그 고개 이름을 만리재(萬理岾)라 불렀다.

 

뱃사공 손돌현석동

고려 때 사공으로 유명한 손돌이 있었다.몽고군이 침입해오자 손돌이 임금과 귀족들을 태우고 강화로 피난을 갔으나 겨울북서풍 때문에 방향을 잘못 잡아 소용돌이치는 강 한가운데서 그만 노를 놓쳤다. 같이 탄 다른 귀족이 왕을 죽이려는 속셈이라 단정하고 배 위에서 처형을 하였다.

그러나 손돌이 실상은 뒤쫓아 오는 몽고군을 유인하여 안전하게 임금을 피신시키려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이를 후회하며 죽은 사공을 잘 장사지내도록 해주었다. 약 500년이 지난 후, 인조 무렵, 이 손돌의 넋이 이곳에 살던 현석이라는 사공에게 씌워졌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려는 왕과 왕비, 왕자, 대신을 배에 태운 사공현석이 닻을 올리고 노를 저어 강 가운데쯤 갔을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강물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멀리 보니 다른 지역은 청명하기 그지없는데 유독 그곳만 날씨가 험상궂자 배 안의 대신 중 한 사람이 이는 사공의 탓이니 저 사공을 산 제물로 용왕신에게 바치자 하였다.

그리하여 결박당한 현석은 강물 속에 던져졌는데, 신기하게도 날씨가 개이면서 사공이 없는 배가 맞은편 강가에가 닿았다. 배에서 내린 일행들이 현석리 쪽을 바라보니 현석의 노모와 아내가 강가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을 차리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게 해주었다. 이것이 현석동 부군당(府君堂)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마을수호신,
개바위고개 이야기공덕동

염리동 생명줄 교회 지하에 남아있는 바위, 개바위 우물

철종 때 이 마을에 인색하기 그지없던 부자 한 사람이 있었다. 자식이 없던 그는 큰 개한 마리를 수십 년간 자식처럼 길렀으나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개를 찾아다니던 부자는 어느 날 동네 입구 쌍룡산 남쪽에 자신이 길렀던 개와 비슷한 형상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개가 고개를 돌리고 컹컹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가가서 보니 개가 아니고 바위였다. 바위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덧없음을 알고 재물을 풀어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자신은 정처 없는 유랑을 떠났다.

한편 이 개바위가 생긴 뒤로 마을에는 도둑이 들지 않았고, 이에 동네사람들은 개바위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부자가 동네를 떠난 매년 음력 7월 1일을 기일로 정해 개바위에 제사를 지냈다.

개바위 아래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냉정(冷井)물, 찬우물이라고도 한다. 속설에는 부잣집의 개가 집을 나왔다가 이 우물에서 물을 먹은 후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40년 전까지는 무속인들이 많이 찾아와 고사도 지내고 치성도 드렸던 장소이나 6·25전쟁이후로는 맥이 끊겨버렸다.

 

도화낭자도화동 이름이 붙은 계기

복사꽃어린이 공원에 있는 도화낭자 동상

마음씨 착한 김씨 노인과 무남독녀 도화낭자가 살았는데 도화낭자의 아리따운 모습과 마음씨가 하늘에까지 닿아 옥황상제의 며느리로 간택돼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딸과의 이별을 서운해하는 김 노인을 애처롭게 생각한 천관은 천상의 복숭아 하나를 주었고, 김 노인은 그 씨앗을 집 근처에 심어 복사나무를 딸을 돌보는 마음으로 키웠다.

노인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노인과 도화낭자를 기려 복사나무를 심어 가꾸었고, 마을 일대가 복사꽃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나라 병사와 처녀 이야기당인동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병사 한 사람이 조선의 처녀에게 반해버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돌아가지 않고 내내 청혼을 했건만 처녀는 결국 마음을 허락하지 않고, 과거 낙방생의 후실이 되어 그사람을 따라 경상도로 갔다. 그러나 본처의 구박이 심한 데다가 3년 후 남편마저 죽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친정인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처녀를 잊지 못하고 기다리던 명나라 병사가 다시 구혼하자 마침내 승낙하여 부부가 되었다.

명나라 병사는 힘도 세고 부지런해서 일도 잘할 뿐만 아니라 물감먹이는 일에도 뛰어났다. 주로 댕기에 물감을 먹이고 금색으로 글씨를 쓰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이 일로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다섯 형제까지 둔 명나라 병사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는데 죽기 전에 부모님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하였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남편을 중국으로 보낸 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5년이 지날 무렵, 한 중국인이 와서 그 병사가 이미 장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며 조그마한 금덩이 두 개를 병사의 유물이라며 전해주었다. 다섯 아이는 자라면서 부친인 명나라 병사를 닮았고,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 마을을 ‘댕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홍문(紅門)도화동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일이다. 지심은 어머니가 일찍 죽고 아버지 밑에서 동냥젖으로 컸는데, 어린 나이에도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뒷바라지는 물론 동네의 일은 도맡아 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친딸처럼 여겼다. 어느 날 지심이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호랑이 한 마리와 마주쳤다.

입버룻처럼 “고기를 먹고 싶다”는 아버지를 떠올린 지심은호랑이를 잡기로 마음먹고 맨손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점차 수세에 몰린 지심을 본 포수가 호랑이에게 총을 쏘아 그녀를 구했고, 그간의 사정을 들은 포수는 가죽만 챙겨가고 호랑이 고기를 지심에게주었다. 지심은 아버지를 위해 호랑이 고기로 탕을 끓이고, 구워서드렸다.

이 소문을 듣게 된 영조는 지심에게 효녀정려문을 내렸다. 이 정려문은 도화동 298번지에 고종 초까지 남아 있었는데 프랑스함대가 서강까지 들어올 무렵 군사들의 진로에 방해가 된다 하여철거하고 그 터만 남았다.

 

장사바위 이야기신수동

한 장사(壯士)가 있었는데 얼마나 기운이좋던지, 바위를 짚고 올라가니 손톱자국과 발톱자국이 파여 흔적이 남았고, 바위에 소변을 보았더니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이런 장사가 다시 태어날까 걱정한 일제는 그 구멍에 정을 박고쇳물을 끓여 부어 장사의 혈(穴)을 끊어놓았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살던 한 부부가 있었는데 혼인한 지 28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지나가던 탁발승이 시주를 하면 아이를 점지해주겠다는 말을 하였고, 이에 노부부는 집안의 재산 절반을 뚝 떼어 절에바쳤다. 얼마 후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었는데 열 달이 지나도 출산을 못하다가 열 다섯달 만에야 겨우 태어났다. 나오자마자 아이는 활을 쏘고 한 손으로 커다란 나무를 뽑는 기이한 행동을 하였다. 놀란 노부부는 아이의 이러한 행동을 쉬쉬하며 감췄다.

이 무렵은 나라에서 장사는 반역을 꾀할 우려가 있으므로 모두 잡아들이라고 하여 포졸들이 집집마다 조사할 때였다. 한편 젊었을때부터 이 부인을 사모하고 있던 같은 동네 홀아비가 이 집 아이가 장사라고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원들이 아이를 체포하러 오자 일곱 살 된 장사는 바위를 던지며 저항하다가 포졸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포졸들 이 달려들어 아기 장사를 체포하여 처형하자 노부부의 상심은 매우 컸다. 이에 남편은 쪽박산 위로 올라가 아이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자 산의 모양이 그 한숨소리에 쪽박처럼 작아졌고 부인은 한강으로 달려가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관헌과 싸우면서 아기 장사가 던진 바위가 바로 ‘박힌 바위’이다.(현재 성결교회 아래쪽 202번지 3호 부근에 있었으나 1977년경 주택을 지을 때 없어졌다.)

 

강성샘동교동

신촌전화국 부근에는 ‘강성샘’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다. 둘레 20평 정도의 수렁인데 사람이 빠지면 나올 수가 없는 갯벌처럼 된 곳으로 한강과 통했다는 설이 있다. 아기의 태를 이곳에 버려야만 무병장수할 수 있다 하여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까지 와서 태를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태가 썩는악취가 대단해서 일제강점기 때는 이곳에 태를 버릴 경우 벌금 등의 처벌을 한다는 팻말을 붙여 놓기도 하였다.